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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2018-05-05


나름대로 분주히 뭔가 한 것 같은데
아무 한 것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네

  • <이 노래가>, 정승환


#1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면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가족과의 ‘원만한’ 관계. 내 고등학교 동창들이자 ‘인생’ 친구들. ‘언젠가’ 꼭 같이 창업하고 싶은 HCI 팀원들. 2016년을 동고동락’했던’ 기획단 친구들. 몇몇 ‘꽤’ 친한 동아리원들. 그리고 ‘변변치 않은’ 코딩 실력. 그나마 인생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놈들은 한 학기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렵고, 기획단 친구들은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이 전부이다. 아, 딱 하나 손으로는 셀 수 없는 게 있다. 23살이나 처먹은 내 나이.

나머지는 다 버렸다. 내가 쥐기에는 버겁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크게 후회되지 않는 판단이기도 하다.

한 때, 소위 ‘핵인싸’인 친구를 보고 나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랑 교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외로워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능력치가 있고, 그 분수에 맞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이를 깨달았다. 이는 본능이고 태어날 때부터 탑재된 성향이라 이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아무리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나는 사람들이랑 만나 진심으로 웃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과 지낸 시간의 몇 배를 반드시 혼자 보내야만 했다. 반면 아까 핵인싸라고 불렀던 친구는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애초부터 판이 불리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처럼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정말 취하고 싶은 인간관계만을 골랐다. 그렇게 해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과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절묘한 밸런스를 맞춰왔다. 그렇게 나는 훨씬 행복해졌다.

#2

지난 6개월간 개발에 대한 불타는 열정 때문에 인간관계에 좀 소홀했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인 것 같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냐면, 밥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밥먹으면서 개발 공부를 하려고 맨날 혼자 밥을 먹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동아리방으로 가서 개발 공부를 했다. 자기 전까지 계속 개발을 했다. 자연스럽게 하루 일과는 수업 - 개발 - 잠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새 인간관계를 쌓는 것은 꿈도 못꾸고 기존에 있던 관계에도 좀 소홀히 했다.

그러다 개발에 현타가 왔다. 이번엔 이전에 전공을 바꿨을 때랑 좀 다른 느낌인데, 왜냐하면 개발은 내가 정말 신중히 고른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현타가 굉장히 빠르게 왔고, 이제 와서 바꿀 전공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현타를 겪고 나서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산다면 나는 앞으로도 꽤 짧은 주기로 내가 하는 일에 현타를 겪을 예정이고,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을 걸고 열심히 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방황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 불행할 것임이 분명했다.

이를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의 내 삶의 방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걸고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왔고, 이를 찾으면 최선을 다해 그 한 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달리는 것을 잠시 멈추니 내 주변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기에는 나는 모든 것에 너무 쉽게 질리는 사람이었다.

그 동안 참 열심히 달려왔다. 달려온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일단 나는 인생은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껏 태어난 인생, 태어나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보다 최대한 열심히, 스스로에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항상 100m 전력질주를 해왔다. 또한, 그렇게 전력질주를 하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했다. 즐겁지 않았다면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전력질주는 하지 못했겠지.

그렇지만 영재라는 타이틀, 남들보다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내 ‘분수’에 대한 깨달음이 은연중에 항상 내 등을 떠밀었던 것 같다는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이러한 책임감이 없었더라도 나는 여전히 열심히 달릴 수 있을까.

#3

현타가 온 뒤로 전력질주를 멈추고 걷기 시작하자, 갑자기 보이지 않던 주변 풍경이 보였다. 전역한 친구와 영화를 보면서 맥주 한캔을 먹으며 떠는 수다. 운동을 하면서 느껴지는 내 몸의 변화. 책을 읽으며 체험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 노래를 들으며 오롯이 감성에 폭 젖는 느낌. 글을 쓰면서 하게 되는 여러가지 생각. 요 몇 주동안 꽤 행복했다. 단지 이런 감정만으로도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특별하게 태어났고, 특별함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살아야겠다고 언제나 생각했다. 실제로도 나는 꽤 특별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고, 꽤 특별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과연 특별하게 살고 싶었던 걸까. 사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는데. 조금 이해가 빠른 머리 빼고는 남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모자른,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조금만 더 쉬어보기로 결정했다. 산책하며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지금, 나는 제법 행복하다.

언젠가는 다시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으면 온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 새로운 내 분수를 깨달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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