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2025년은 변화의 한 해였다’ 라고 첫 문장을 적고 있었는데, 문득 2025년 1월 1일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2025년에 내가 변화했다고 확신할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2024년과 2023년에 남긴 연말 회고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변화가 없지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취향에 관하여
2년 전도, 1년 전도, 결국 문제는 취향
아래는 기존 2년간 연말에 적은 회고글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2023년
- 단 음식은 맛있지만, 이를 썩게 만든다. 내가 변화하지 못하고 있고, 내가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걸 불안해서 못 견디는 성격인 것이 문제다. 같은 무게의 덤벨, 같은 횟수의 볼륨으로 운동을 많이 반복한다고 해서 근육이 늘지는 않는 것처럼, 바쁘고 규칙적인 삶은 나라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쾌하고 묵직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 요약하자면, 올해 내가 느낀 불안은 크게 두 가지 요소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 여유가 부족하여 어떤 일에도 깊게 몰입하지 못한 것.
- 몰입할 일을 결정할 우선순위 기준을 착각하고 있던 것.
올해 논란이 되었다는 장강명 작가의 글을 보고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반면 잡학에도 깊이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내가 끝내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지만 경청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주제를 다양한 맥락에서 검토했고, 한 측면을 추상화하여 전혀 다른 범주에 있는 다른 사건과 유연하게 잇는 능력이 있으며, 메타인지도 확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지성과 주관에 경험까지 더해진 사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그런 이들을 “콘텐트가 있다”고 표현한다.이 글을 보면서 요즘 내게 부족했던 게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주제에 몰입하여 깊게 파고들면서 공부하고, 이를 온전히 내것으로 습득하는 것.
되돌아보면, 내가 개발자로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지식은 대부분 기술 블로그를 열심히 작성하던 2~3년 전과,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던 2년 전 백수 기간일 때 쌓인 것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내가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이를 기록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이해대로 지식을 구조화하여 취득한 지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지식은 대부분 휘발되어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2024년
- 며칠 전 일기에서 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결실이다.
오늘 주말이고 할 일 없는데 뭐하지 하면서 멍때리다가 든 생각… 휴고상 받은 소설 읽으려다가, 읽어봤자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생각을 곱씹다 보니 지금 몰입을 못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뭘 해도 몰입을 못하니 쌓이는 게 없는 느낌. 회사 일이랑 크로스핏은 어영부영 하고 있는데, 내가 실제로 하고 싶은 건 계뿌클이랑 음악 등등이다. 근데 이런 거에 몰입하려고 하면 “에이 해봤자 일주일에 3시간밖에 못 하는데 열심히 해서 뭐하나”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어영부영 되는 듯.
- 자신의 분야에 진심이고, 인사이트가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각자 분야는 다르지만 진심인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들에 비해 무엇에 더 진심이고, 어떤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항상 누군가를 따라가기만 하는가? 이는 결국 이전에 했던 오리지널리티와 취향에 대한 고민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 며칠 전 일기에서 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결실이다.
2023년과 2024년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몰입이 어렵고, 취향의 누적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올해도 동일하게 느낀 문제였으며, 어느 정도 진전이 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누적이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2024년, 몰입에는 성공했지만
2023년 말 몰입과 취향의 누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후로, 2024년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2024년에는 특정 주제에 몰입해서 공부하고, 이를 기록해서 내 취향으로 누적시키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2024년에 집중한 분야는 주로 자산 관리와 거시 경제 측면이었다. 결혼을 고려하니 돈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노동 소득 뿐만 아니라 자본 소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내게 가장 적절한 투자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몰입을 했다. 2023년에 회고한대로 열심히 기록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지식의 휘발이 줄어들고,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몰입은 취향의 누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게 가장 적절한 투자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2024년 중순 ~ 말에 찾으면서 투자 공부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1. 미국 달러로 2. 인덱스 펀드를 투자하고, 3. 장기 투자를 하며, 4. 젋었을 때는 레버리지 비율을 높게 투자하다가 은퇴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레버리지 비율을 1배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내게 맞는 투자 방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원칙을 거의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단순 재미를 위해 단타를 조금 치긴 하지만 자산의 10% 이하로만 하고, 자산의 대부분은 저 원칙대로 투자한다.
두 번째가 더욱 중요한데, 투자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투자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재미가 아니라 필요 때문이었다. 투자 공부하는 과정에서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돈을 ‘크게’ 버는 일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위의 투자 전략을 세운 이후에는 투자 공부를 추가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국 달러로 인덱스 펀드를 투자하기만 해도 반은 먹고 갈 것 같은데, 그 이상의 수익률은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즉, 몰입은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업무적인 몰입에 가까웠지, 취향을 쌓는 몰입은 아니었던 것이다.
2025년, 본격적인 취향의 누적을 시작하다
2025년에는 이런 측면에서 확실히 진전이 있었다. 목적이 없는, 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주제에 대해 몰입해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됐는데,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문제 의식 -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떨어지고 있고,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 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상당히 즐거웠다. 지금은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아세모글루가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역시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껍고(둘 다 약 700~800쪽) 내 전공과 상관 없는 책을 ‘즐겁다’는 이유로 읽는다는 점이다. 이걸 읽는 이유는 그냥 재미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최전선에 있는 뛰어난 지적 성취가 무엇인지, 세상이 동작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궁금증을 해결하면서 지적 만족을 느끼는 것이 즐겁다.
예를 들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주장은, 산업혁명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경제적 발전이 사유재산권 보호, 법치주의, 공정한 시장 거래로 인해 개인이 파괴적 혁신을 일으킬 ‘인센티브 구조’가 존재했다는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수백 쪽에 걸쳐서 계속 이어가는데,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이 재밌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간은 슴슴하지만 감동이 느껴지는 맛집에 온 기분이랄까.
내 코어 아이덴티티 중 하나가 개발자이긴 하지만, 나는 AI를 공부하는 것보다 이런 걸 공부하는 게 ‘그냥’,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더 재밌다. 덕분에 다양한 사회 현상이나 세상이 동작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내 취향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됐다.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
이러한 취향의 발견이 더더욱 기쁜 이유는 이것이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라는 책을 읽었는데, 역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엮어서 낸 책이다. 많은 수상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따라가라는 조언이었다.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만 호기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므로, 호기심을 인생의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취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과 그렇지 않은 취향이다. 이를테면 크로스핏은 호기심 기반 취향이 아니다. 운동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 기록의 progression에서 오는 성취감, 운동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유대감이 주요한 즐거움이다. 반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상의 메커니즘을 궁금해하고 공부하는 것은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이다.
두 가지 취향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면 나는 호기심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탐구하는 취향을 더 선호하는 성향인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의 누적이 단절되었다. 가장 최근까지 있었던 취향의 누적은 개발이었는데, 개발에 대한 탐구는 한 2년 전에 <데이터 중심 애플리케이션 설계>를 읽은 이후에 멈췄다. 일을 더 잘하는 데 있어서 개발보다 리딩 능력이 더 중요한 것도 이유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건 더 이상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나는 개발자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꽤 어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러다 보니 개발자로서 더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개발에 대한 호기심이 어느 순간 증발했다. 그 대신 사회가, 세상이 동작하는 메커니즘이 궁금해진 게 아닌가 싶다.
꼭 무언가를 공부하는 것만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취향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떠오르는 예시는 게임이다. 게임은 어떤 경험, 생각, 체험, 느낌을 전달하는 측면에서 자유도가 매우 높다. 그래서 책이나 영화와 비교했을 때 저점은 매우 낮고 고점이 매우 높은 매체, 혹은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하 야숨)은 자유도라는 게임의 장점을 가장 잘 살려낸 형태의 작품이었다. 야숨을 플레이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몰입한 순간 중 하나였고, 내가 게임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야숨이라는 극강의 몰입을 한 번 경험하고 나니,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다음 게임을 계속 기다리고, 찾아나서게 됐다. 즉, 게임이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감동에 대해 계속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취향
어떤 취향을 누적하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호기심 외에도 내가 내 취향에 바라는 몇 가지 조건이 더 떠올랐다.
하나는 취향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변화시켜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시 게임을 예시로 가져와보면, 게임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종합 예술 작품에 가까운 게임도 있지만, 단순히 오락성과 중독성이 짙은 게임도 있고, 함께 즐기기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게임도 있다. 나는 내 취향이 나의 오리지널리티를 더해주거나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 활용되면 좋겠으므로, 이왕 게임을 즐길 것이라면 오락성이 짙은 게임보다는 종합 예술 작품 같은 게임이나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취향을 단순히 그 시간의 쾌락에만 집중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의 누적이 가져다줄 미래의 즐거움까지 함께 고려해서 취향을 선택하고 싶다.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취향
취향에 바라는 다른 한 가지 조건은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하나 봤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가 인상 깊게 보았다.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자기 자신과의 인간관계이고, 근본적으로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이므로, 혼자 잘 있는 방법을 잘 배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요 몇 년간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나름 노력을 좀 썼는데, 사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나는 세상의 다른 많은 재능처럼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e.g. 내향성/외향성, 유머러스함 등). 그리고 내 인간관계 쪽의 재능은 꽝인 것 같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므로 어느 정도 기본은 하기 위해 연습을 해야 하는데, 연습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 주로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과의 관계에 소홀해진 것 같다. 최근 들어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 분명 이전에는 혼자 있다고 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고, 혼자인 시간이 즐거웠는데. 되돌아보니 이는 타인과의 관계를 더 잘 유지하기 위해 이미 시간과 에너지를 썼으므로,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를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년에는 타인과의 관계와 나 자신과의 관계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오롯이 혼자서도 잘 즐길 수 있는 취향을 잘 찾아야겠다.
컨텐츠, 요리, 그리고 기록
이런 회고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크게 두 가지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다양한 컨텐츠를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게임과 웹툰, 웹소설에 한정해서 컨텐츠를 소비하고 있었는데, 책이나 영화 등으로 관심사를 좀 더 확장해보려고 한다. 최근 회사가 방학이라서 책도 한 권 읽고, 영화도 한두편 봤는데, ‘아, 책과 영화가 이런 재미를 줬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집에 들어가면 피곤하니 관성적으로 원래 하던 게임을 하고, 누워서 원래 보던 웹툰과 웹소설을 봤다. 물론 즐겁긴 하지만, 아무래도 당장의 오락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책과 영화에는 대중적으로 탁월하다고 인정받지만 아직 내가 감상하지 않은 ‘low hanging fruit’ 작품이 많기도 하고, 아무래도 호기심을 해결하거나 스몰 토크 주제로 활용하기에 좋은 컨텐츠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요리이다. 최근에 <흑백요리사 2>를 재밌게 봤는데, 보면서 나도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전부터 내가 요리라는 취미를 좋아할 것 같고, 또 잘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맛에 너무 둔감하지 않고, 맛집 가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또한 요리가 꽤 공학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각 재료와 이들의 조합이 어떤 맛을 내는지를 이해하고, 다양한 쿠킹 방법이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지 파악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해서 원하는 맛을 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손재주도 나쁘지 않은 편이니, 요리가 꽤 해볼만한 취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주고 싶다는 로망이 있기도 했고, 요리에 익숙해지면 생활비를 꽤 아낄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다.
지금 생각하는 방향성은 다양한 컨텐츠를 소비하고 요리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이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취향은 늘 바뀌니까. 그래서 사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컨텐츠를 소비하든 요리를 공부하든 다른 취미든 그 과정을 잘 기록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취향이 아니라 취향의 ‘누적’이 더 중요하다. 2026년 연말에 회고할 때는 2025년 연말보다 더 많은 기록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다정함에 관하여
인생의 분기점
내 인생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몇 가지 경험이 있다.
- 초등학교 수학 과외 - 과외가 인생을 바꿨다고 하니까 좀 뜬금없지만, 초등학교 때 받은 수학 과외는 내 이과적 재능과 적성이 꽤 괜찮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6학년에 초6 과정부터 시작했는데, 그해가 끝나기 전에 중3 과정을 마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학 문제 푸는 것이 참 재미있었고, 과고 입시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재고 진학은 내 인생의 뼈대를 이루는 선택이 되었다.
- <엘리건트 유니버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대중 과학서 중 하나이지만, 기억하기로 난이도가 꽤 흉악했던 것 같다. 현대물리학의 역사와 초끈이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이론물리학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년짜리 결심이긴 했지만, 내가 과학을 사랑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 고등학교 코딩 경험 - 대학교에 진학할 때만 해도 나는 가상현실 연구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자공학과나 바이오 쪽 전공을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자공학과 전공 수업을 들어보니 어찌나 재미가 없었던지 남은 3년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생각났던 것이, 고등학교 때 코딩 수업을 딱 하나 들었었는데 그 수업이 참 재미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전산학부로 진학을 했고, 지금까지도 개발자로 잘 먹고 살고 있다.
- <인사이드 빌게이츠> -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대학교 때 봤던 것 같다. 빌 게이츠의 개인사와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해결하는 문제에 대한 홍보를 적절히 교차편집한 내용이다. 이 컨텐츠를 보며 돈이 되지 않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고, 이는 7년의 시간이 지나 계뿌클 합류라는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호주 여행, 다정한 사회를 목격하다
이 다음의 분기점은 2023년 봄 약 2주에 걸쳐서 다녀온 호주 여행이다.
호주 여행 중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와중이었다. 코너를 돌았는데, 어떤 나이 드신 여성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분은 자연스럽게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하며 살짝 인사를 해주셨다. 얼떨결에 나도 웃으면서 까딱 인사를 드리고는 스쳐 지나갔다. 뭐지? 관광객처럼 보였나? 근데 관광객이랑 눈 마주친다고 인사를 해주지는 않는데?
그리고 이런 일은 호주에서 여행하는 내내 겪었다. 길가를 지나가면서 눈이 마주치는 사람 대부분이 씩 웃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마주치면 싱긋 웃는 것이 그냥 호주의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딱 봐도 관광객처럼 보였거나 동양인 특성상 어려 보여서 더 친절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소는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그냥 몸에 밴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지낸 지 며칠이 지나자, 나는 눈이 마주쳤을 때 싱긋 웃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냥 나도 웃고 다녔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내가 먼저 싱긋 웃었다고 해서 눈살 찌푸리면서 시선을 돌리거나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녔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으면 이상하니까.
다정함의 부재
호주 여행을 통해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았지만, 사실 내면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감정은 바로 저 ‘다정함’에 대한 그리움이다. 있을 때는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는 말처럼, 호주에서 싱긋싱긋 웃고 다닐 때는 이 웃음이 주는 가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제서야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딱딱한지, 그리고 그 삭막함이 사람의 기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앞서 눈을 마주쳤을 때의 웃음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지만, 길을 걷다 보면 몇 가지 차이점이 더 있다. 이를테면, 호주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을 돕는 것에 보다 적극적이고, 도움을 주는 것이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나는 휠체어 사용자와 호주 여행을 같이 다녀왔는데, 문을 열어주거나 엘리베이터를 양보해주는 비율이 한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엘리베이터의 경우에는 양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를 표하는 것에도 자연스럽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에서는 어김없이 ‘thank you’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다정함은 일상적인 기분의 평균을 올려준다. 반대로, 다정함이 없는 길거리를 걷다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호주 여행을 한 뒤로부터, 한국에서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호주처럼 다정하고 기분이 좋은 사회가 되는 데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친절과 배려가 부재한 길거리를 걸어다녀야 하는가? 라는 거대한 비효율에 화가 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어느새 내 안에서 다정한 사회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호주에 다녀온지 2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이는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
‘좋은 사람’의 기준
최근에 이런 내용을 일기에 적었다. 스스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존감이 많이 내려간 것 같다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잘 버텨내야 한다고.
대학교 때만 해도 공부 잘하고, 일을 잘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공계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진로인 환경에서 자랐고, 여기에 중요한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부를 나쁘지 않게 하는 편이었고, 덕분에 여러가지 혜택도 받았으며, 동아리 활동도 개발 동아리 같은 일과 관련된 동아리를 했으므로 공부 말고 굳이 다른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기숙사 생활을 해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는 점도 중요했던 것 같다.
회사를 다니고, 서울이라는 낯선 장소로 생활의 무대를 옮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을 잘하는 것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가 되었고, 인간관계는 더이상 당연히 제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7년간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이 많이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닌 ‘다정한 사람’으로.
기준이 바뀌는 것보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 훨씬 느리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준이 바뀌었는데 사람은 덜 바뀌었으니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에서 멀어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존감이 내려가는 것은 기분이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새롭게 바뀐 ‘좋은 사람’의 기준이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 여전히 일을 잘하는 게 내게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제 나는 일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확신이 든다.
다정함의 재발견
호주에 다녀온 뒤로, 계뿌클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기존에도 바쁜 일상 속에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계뿌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놀랍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으로 기꺼이 도움을 주고 받으려고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다정한 사람들이 참 멋지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는구나 싶었다. 각종 행사나 업무로 인해 계뿌클 커뮤니티 참가자분들과 만나게 되면 공기 자체가 즐겁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다정함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계뿌클 뿐만이 아니다. 계뿌클에서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영리단체, 비영리단체를 지원하는 단체, 혹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들과 만나면서 세상에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과 실행이 정말 많고,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큰 기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여기에 더 기여하고, 이들과의 접점을 늘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내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임과 동시에, 다정함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아서. 계뿌클에 합류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바뀔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호주를 다녀오면서, 계뿌클을 보면서 다정함의 부재에 화가 난다는 이야기를 위에서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환하는 법을 배웠다. 바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다정함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더 다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호주와 같은 다정한 사회가 실존한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계뿌클을 통해 우리 주변에도 다정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언젠가 우리 사회 전체에 다정함이 더 많이 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요즘 많이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하더라도 아무 효용이 없다면 굳이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언젠가 바뀔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내가 먼저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먼저 다정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급적 인사를 먼저 건내고, 가능하면 무표정보다는 미소를 머금고, 문을 잡아주고, 도움이 필요한지를 먼저 여쭤보려고 한다. 보통 반응이 없지만, 가끔가다 인사가 되돌아오거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듣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은은하게 좋다. 다른 사람들도 내 덕분에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올해의 문장들
마지막으로, 올해 열심히 되뇌인 문장들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 할까말까 할 땐 한다.
-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