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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팔도감 합병

2025-09-26

이 글은 팔도감을 합병하면서 내가 경험한 것, 그 과정에서 한 생각을 담은 글이다.

  • 팔도감(라포테이블)은 퀸잇(라포랩스)의 자회사였다. 퀸잇이 집중하고 있던 패션 분야 말고, 4050 여성분들이 좋아하는 또다른 버티컬인 식품에 집중하는 팀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 2021년 정도에 라포랩스에 있던 일부 인원이 라포테이블을 창업해서 팔도감 서비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 2024년 어느날, 팔도감이 합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0% 지분흡수를 하면서 팔도감 팀이랑 오피스도 합치고, 심지어 제품팀은 아예 퀸잇-팔도감 제품팀으로 통합을 한다는 것이었다.
  • 합병을 할 당시에 여러가지 우려사항과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지만, 솔직히 그건 기억이 잘 안 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실제로 그 후에 내가 한 일들과 거기서 느낀 감정 뿐이다.
  • 팔도감 합병으로 인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겠지만 내게도 꽤 괴로운 변화였다.
  • 합병으로 인한 주요한 변화는 해야 할 일의 양이 늘어난 것이었다. 커머스 플랫폼 팀은 퀸잇 뿐만 아니라 팔도감의 주문, 정산, 결제, 쿠폰 등도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DevOps 팀, QA 팀 등 다른 플랫폼 팀들도 동일한 상황이었다.
  • 그런데, 사실 일은 할만 했다. 연차가 어느 정도 찬 뒤부터 어차피 개발 자체로부터 오는 재미는 별로 없었다. 그냥 어떤 개발을 하느냐가 달라졌고,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야근을 좀 더 하면 되는 문제였다.
  • 문제는 일을 할 때의 감정적인 소모가 훨씬 커졌다는 것이었다. 퀸잇과 팔도감 팀이 힘을 잘 합쳐야 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 기존 라포랩스 구성원은 팔도감을 자신들의 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다음 달부터 팔도감도 업무 범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니 좋게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라포테이블 구성원은 합병 과정에서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서비스를 외부(라포랩스 경영진)의 의지로 인해 강제로 접어야만 했다. 보통 스톡 가치를 후하게 쳐주지 않기 때문에, 보상 측면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 라포테이블의 제품팀은 라포랩스 제품팀에 흡수되었으므로 제품팀을 뺏겼다고 느꼈을 것이다.
  • 이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상황에서 오피스를 합치고 일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 오니, 크고 작은 갈등과 이로 인한 감정 소모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는 편이기도 하고, 원래 세웠던 퇴사 플랜도 합병으로 인한 업무가 쏟아지는 바람에 미룰 수밖에 없어서 말년이 매우 괴로웠다.
  • 내가 괴로웠던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경영진이 내린 합병이라는 결정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결정이었다. 합병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었고, 내가 없는 지금도 많이 겪고 있겠지만, 실제로 합병 전후로 라포랩스 제품팀의 분위기가 경영진이 의도한 방향으로 많이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재무제표도 더 예뻐지고. 결국 경영진과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의도한 대로 회사가 변화했고, 그렇기에 좋은 선택으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 이렇게 수 년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결정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방향성을 잘 찍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품고, 직원들이 욕할 게 뻔한대도 욕먹을 용기를 가지고 실행하는 것. 이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봤다. 결국 더 크고 다양한 실행과 실패를 경험하고, 더 다양한 사람과 연결되어 조언을 구하는 것밖에 없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병 이후 대처가 미흡했다는 점은 아쉽다. 숲은 커졌지만, 나무가 좀 덜 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회사의 1순위 목표는 당연히 이윤 추구이지만, 그 안에서 가능하다면 회사는 직원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살아서 나쁠 것 없고, 직장은 개인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근데 병합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불행해진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약간은 덜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게 오히려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들이 있다.
  • VCNC에서는 법에 의해 사업이 좌절된 이후 희망퇴직을 지켜보는 경험을 하고, 라포랩스에서는 자회사와 합병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런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웠던 만큼 나중에 더 성숙하고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